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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5】목은 이색과 한산 영모리 영당(차따라:25)

【0025】목은 이색과 한산 영모리 영당(차따라:25)

한국일보 97.10.28 24면 (문화)


◎ 찻물 끓는 소리가 멋스런 시어로

/이슬먹은 차싹 ꡐ노아ꡑ 등 숱한 차어 만들어

/불사이군 은둔 때도 다기만은 꼭 챙겨

목은 이색(1328~1396)은 고려시대의 대표적 「선비 차인」이다. 몸가짐과 집안을 바르게 하고, 나라와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군자의 길이 차 한 잔을 다루는 데서 시작한다는 차풍이었다. 그의 수많은 차시는 의를 지키고, 뜻(의)을 굽히지 않고, 바른 길을 가고(정도), 참됨을 지키는 것(수진)이 무엇인지를 가르친다.

「차마신 뒤의 작은 읊조림(다후소영)」에서 그는 이렇게 읊었다.


「작은 병에 샘물을 길어다가/ 깨진 솥에 노아차를 달이는데

/ 문득 귀가 밝아지더니/ 코가 열려서 신령스런 향기를 맡네.

/ 어느덧 눈에 가리운 편견도 사라지고/ 몸 밖의 티끌도 하나 보이지 않네.

/ 차를 혀로 맛 본 뒤 목으로 내리니/ 살과 뼈도 절로 바르게 된다네.

/ 가슴 속 작은 마음자리는/ 밝고 맑아 생각에 사특함이 없어라.

/ 그 어느 때고 천하를 다스릴/ 군자는 집안부터 바르게 하는 법 아니던가」


이처럼 선비정신을 담아 차의 향기와 품격을 높인 데서 차인으로서의 목은의 가치는 빛이 바래지 않는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차, 특히 찻물 끓는 소리를 맛깔스럽게 나타내는 다

양한 표현을 만들어 썼다.

우리 옛차인들은 차와 차생활의 맛과 멋을 다양하게 표현하려 애썼다. 차와 물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찻물 끓이는 불과 찻물끓는 소리에 이르기까지 온갖 멋스런 말을 만들어 썼다.

한 예로 불을 나타낼 때도 그저 강한 불, 약한 불로 쓰지 않았다. 물이 차의 몸이라면 차는 물의 정신이다. 좋은 차와 좋은 물이 만나야 제대로 된 차맛을 낸다. 그러나 물도 불의 강약에 따라 그맛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그런 불의 강약을 나타내기 위해 가장 흔히 사용한 표현이 「활화」, 「문무화」 등이다.

「활화」는 불꽃이 있는 생기있는 불을 뜻한다. 「문무화」는 뭉근하게 타는 문화와 세게 타는 무화가 알맞게 어울린 불이다. 조선초의 대표적 차인의 한사람인 서거정(1420~1488)은 「문무활화」에 차를 달였고, 조선 중종때 영의정을 지냈던 김수동(1457~1512)은 「저울눈 보듯 불길을 다독여 가며」(투다신시 추화) 차를 끓였다.

한국차문화연구소 정영선씨는 목은이 찻물끓는 소리를 가장 다양하게 표현했다고 지적한다. 목은은 「소나무 가지 끝에 드날리는 비를 보듯(송초간비우)」 찻물끓는 소리를 「보고」, 「물소리(수성)」와「시보다 맑은 소리(청시률)」, 「돌솥에서 차 우는(다명석정)」소리를 들었다. 어느 때는 「솔바람」(송풍) 소리, 어느 때는 「비 날리는 소리(소정권비우)」, 「지렁이 우는 소리(다성 인규)」가 된다.

「지렁이 우는 소리」는 「쌔애―」하는 물끓는 소리를 비오는 날지렁이 우는 소리에 비유한 것이지만 단순히 소리만을 나타낸 것은 아니다. 지렁이는 흙과 물만을 먹으면서도 굳이 다른 데서 구차하게 먹이를 얻지 않는다는 맹자의 글을 연상시켜 은근히 선비정신을 강조했다.

목은은 또 「다종」, 「화자」(꽃무늬 오지찻잔), 「노아」(이슬을 먹고 자란 차싹), 「영아」(신령스런 차싹),「다탑」(차마시는 평상) 등 새로운 말을 많이 만들어 썼다.

그는 아버지 이곡(1298~1351)과 많이 닮았다. 아버지도 유명한 차인이었고 원나라의 과거시험에 합격할 만큼 학식이 높았다. 어려서부터 수재 소리를 들었던 목은도 14세의 나이로 성균시에 합격했고 26세때 원나라의 과거에 붙어 아버지 못지 않은 출세가도를 달렸다. 성균관 대사성으로 새로운 학풍인 성리학의 도입과 보급에 힘썼다. 1392년 7월 이성계는 마침내 공양왕을 원주로 몰아내고 수창궁에서 조선의 건국을 선언한다. 목은은 65세의 노구로 장단땅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때였다. 두 아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조선 건국에 대항하다가 피살됐다. 새 왕조는 구정객을 관대하게 용서하고 벼슬도 내렸다. 그러나 목은은 『망국의 사대부는 해골을 옛산에 묻을 뿐』이라고 이를 거절하고 더욱 깊은 산골로 들어 가 은둔 생활을 보내다 여강가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불사이군」의 삼은으로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쉬면서 흐르는 물소리 들음이여

/ 마치 옥통소 부는 소리.

/ 곧장 불피워 차를 달이려니

/ 육우가 탐하던 그 맛 시들하구나」


산으로 숨어 들던 늙은 목은의 괴나리 봇짐에는 손때 묻은 다기가 챙겨져 있었다. 또 칡넝쿨을 꼬아 만든 망태기에는 숯이 담긴 풍로가 들어 있어서 좋은 물을 만나면 바로 불을 지펴 차를 달여 마셨다.


「찬 우물 길어다가/ 밝은 창가에서 차를 달이네.

/ 온 정성 다해 물을 끓이니/ 뼈 속까지 스민 사악한 생각이 지워진다네.

/ 시냇가에 달 떨어지고/ 푸른 구름은 바람에 비끼느데

/ 그 가운데 참다운 맛을 알고서/ 다시 침침한 눈을 씻는다」 (「차를 달이며(점다)」)

충남 서천군 한산면 영모리 기린봉 아래 「목은 이색선생 영당」. 산뜻하게 포장된 새 길이 사방으로 통해 있어 서천이나 장항, 부여, 강경 등 어디에서도 쉽게 한산으로 갈 수 있다. 한산에서 「이색선생 사당」을 찾으면 모두들 고개를 갸웃거린다. 대신 「목은선생 사당」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하나같이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 준다. 봉서사로 가는 좁은 외길을 10여리쯤 달려 「절고개」를 넘어서면 바로 목은이 어린시절을 보낸 고향마을이다. 감싸듯 영당을 내려다 보고 선 늙은 백일홍 나뭇잎이 붉게 물들어 하나 둘 지고 있다.<김대성 편집위원>


◎ 알기쉬운 차입문

/우리의 막사발 다기로 쓴 일 문화

/역수입한 세태에 문화의 아이러니

다기를 구하기 위해 차전문점을 찾으면 백자나 청자보다 왠지 분청으로 된 다기가 더 많다.

느끼기 나름이지만 분청은 청자보다 소박하고 백자보다 따뜻하다. 그래서 소박하고 따뜻한 맛을 추구하는 차인들이 선호하는 모양이다.

이웃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잎차용 찻잔은 대부분 백자계열이고 홍차는 거의 100% 백색의 본차이나 계통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에는 다른 나라와 전혀 다른 독특한 다기 양식이 있었던 것일까.

찻잔으로 분청그릇을 쓰게 된 것은 우리 다기문화의 본모습은 아니다. 일본 차문화의 역수입에서 빚어진 현상이다. 바로 몇몇 「차연구가」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일본 차문화를 거르지 않고 들여 오거나 엉뚱하게 전달한 데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일본인들이 흔히 차완이라고 부르는 우리 그릇을 아무 생각없이 차사발 또는 막사발이라 부른다. 심지어 미시마(삼도), 이도(정호) 등 일본 이름 그대로 세분해 부르는 사람도 있다. 특히 김해에서 생산되던 그릇을 일본인들이 부르는 대로 「긴카이(김해)」라고 하는 데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인들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분청그릇에 멋대로 「고려다완」이라는 이름을 붙여 국보급 문화재로 지정했다. 하나 하나에도 고유한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정작 조선 막사발의 본고장인 우리나라에는 국보는 커녕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막사발 하나도 없다.

이런 혼란은 일본인들이 형태로는 분명히 잎차용인 찻잔에 유약을 발라 가루차에 어울리도록 바꿔 놓았기 때문이다. 이를 그대로 받아 분청찻잔이 우리 전통의 잎차용 찻잔이라고 하는 것은 어딘지 어색하다.

하지만 혼란 속에는 새로운 가능성도 숨어 있게 마련이다. 약간 거친 듯 하지만 쓸 수록 찻물이 스며 들어 세월의 무게를 더하는 잎차용 분청그릇은 우리 민족 정서와 맥이 통한다. 또 차 한잔을 마실 수 있는 그릇이라면 어떤 것이든 훌륭한 다기가 될 수 있다는 발상도 가능하다.

일본인들이 우리의 밥사발․막걸리사발을 찻잔으로 승화시킨 지혜를 거꾸로 우리라고 배우지 못할 이유가 없다. 전통의 품격과 자유로움을 어울리게 할 수 있는 것도 차생활의 묘미이자 여유다.<박희준 향기를 찾는 사람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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