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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9】광릉 봉선사 다경향실/다향에 젖은 춘원의 한숨(차따라:19)

【0019】광릉 봉선사 다경향실/다향에 젖은 춘원의 한숨(차따라:19)

한국일보 97.09.09 27면 (문화) 기획․연재


◎ 해방이후 납북까지 변절 자책하며 다경향실에 은거

/1․4후퇴때 폭격… 폐허

/76년 다시 세워

/춘원이 차 끓이던 샘물맛만 여전

경기 남양주군 광릉수목원의 봉선사 들머리. 오른쪽 비석거리에 「춘원 이광수 기념비」가 12년째 서 있다. 춘원(1892~?)은 해방이 되던 해인 1945년부터 50년 북한 「인민군」에게 끌려가기까지 봉선사 「다경향실」에 은거하며 작품활동을 계속했다. 지금까지도 친일논쟁의 표적이 되고 있는 그이지만 한국 현대문학의 틀을 다듬은 대문호로서의 발자취를 기리기 위해 후인들이 75년에 비를 세웠다.

최근 경향 각지의 전통찻집은 「다로경권」 「다경향실」 「다향실」 「죽로지실」 등의 현판을 즐겨 단다. 찻물을 끓이는 화로와 경전, 그 위에 은은한 향기까지 함께 하는 곳이라는 격조높은 이름이다.

옛부터 노스님이나 주지스님이 머문 요사채에 흔히 쓰였던 당호이지만 봉선사의 「다로경권」과 「다경향실」은 춘원 때문에 더욱 유명해졌다.


「화로에 불 불어라 차 그릇도 닦았으라

/ 바위샘 길어다가 차 달일 물 끓일 때다

/ 산중에 외로 있으니 차맛인가 하노라」


1946년 9월18일자 춘원의 「산중일기」에 나오는 시조 한 대목이다. 그는 1919년 「3․1독립선언」의 도화선이었던 일본 도쿄(동경)에서의 「2․8독립선언」을 주도했고 상하이(상해)임시정부를 돕는 등 항일 운동을 하다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일제말 창씨개명, 가야마 미쓰로(향산광랑)로 이름을 고치고 일제에 협력한 전력 때문에 해방후 친일파로 지탄을 받게 되자 그는 서울 근교의 외딴 산사인 봉선사로 숨어 들어 「다경향실」에 머문다.

이때 봉선사에서는 항일 운동을 하다가 왜경에 쫓겨 입산 출가한 운허(1892~1980)스님이 당대의 교학을 펴고 있었다. 운허스님은 춘원의 8촌 동생이기도 했다. 그런 인연때문인지 운허 스님은 춘원을 따뜻이 감싸 안았다. 춘원은 이곳에서 글 쓰는 틈틈이 큰법당(대웅전)뒤 언덕 너머에 있는 옹달샘에서 물을 길어다 차끓여 마시길 즐겨 했다. 역사의 큰흐름을 읽지 못해 일제에 협력한 자신의 어두움과 나약함을 한탄하며 한잔의 차로 위안을 삼았던 것일까.

9월20일자 산중일기는 이런 그의 심경을 그대로 담았다.


「화로에 물을 끓여/ 미지근히 식힌 뒤에

/ 한 집음 차를 넣어/ 김 안나게 봉해 놓고

/ 가만히 마음 모아 이분 삼분 지나거든/ 찻종에 따라 내니

/ 호박이 엉키인 듯/ 한 방울 입에 물어

/ 혀 위에 굴려보니/ 달고 향기로움

/ 있는 듯도 없는 듯도/ 두입 세입 넘길수록

/ 마음은 더욱 맑아/ 미미한 맑은 기운

/ 삼계에 두루 차니/화택 번뇌를 한동안 떠날러라

/ 차 물고 오직 마음 없었으라/ 맛 알리라 하노라」


봉선사는 춘원이 찻물을 떴던 바로 그 옹달샘때문에 세워진 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독한 피부병으로 갖은 고생을 했던 조선 7대 임금 세조(1417~1468)는 전국에서도 이름난 물을 찾아 다니며 병을 고치려 했다. 그런 그가 세상을 뜨자 정희왕후와 아들 예종은 물 좋기로 이름난 이곳 2,500여 정보의 땅에 능을 만들고 능을 수호하는 원찰로 봉선사를 세웠다.

봉선사의 학승인 준수 스님은 『물좋기로 이름난 광릉 능내약수 중에서도 이 옹달샘은 특히 유명해 봉선사가 이곳에 자리 잡은 것으로 전해온다』며 『봉선사의 유명한 차맛도 바로 이 물맛 때문』이라고 말했다.

봉선사 큰법당 뒤쪽 언덕에 올라서면 광릉수목원의 울창한 숲이 눈아래로 펼쳐진다. 수목원쪽을 보고 300m쯤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면 비탈진 바위 아래자그마한 옹달샘이 풀숲에 묻혀 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으면 찾기 힘든 곳이다. 지름이 30~40㎝인 바위샘에는 2되 가량의 물이 언제나 고만고만하게 고여있다. 지금은 큰법당 뒤쪽에 철조망이 쳐졌고 그 뒤로는 출입이 금지돼 있다. 옹달샘은 이제 사람의 발길이 끊어져 「새벽에 토끼가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는」 토끼와 산새들의 샘이 돼 있다.

젊은 시절부터 차를 즐겨온 명향차회회장 이재춘(65)씨는 옹달샘 주위에 탐스럽게 자란 머위잎을 따서 동그랗게 깔때기처럼 만들었다. 머위잎잔으로 물을 떠 마셔 보고는 『수박같은 물맛』이라고 감탄했다. 『옛 어른들의 말이 허언이 아니다』며 연신 고개를 끄떡였다. 차와 관련한 춘원의 기억 가운데 가장 아픈 대목은 장티푸스를 앓다 숨진 아들을 그리는 대목이다. 「아빠, 뜨뜻한 찻물에 꿀 타주어 하고 새벽잠이 든 나를 깨우던 것, 꿀을 탄 차를 그리도 맛있게 먹던 것…」 그런 이별의 고통과 자신에 대한 회한은 쉽사리 달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오늘 어머니 가신 날. 어제 오후에 차 한 봉지를 얻었기로 달여 먹었더니 정신이 쇄락하다. 내게 일년동안이나 좋은 차를 대어주던 벗을 생각하다. 아침 예불에 차차 마음이 오올어 진다」

춘원이 5년여 은둔했던 「다경향실」은 1․4후퇴때 폭격으로 폭삭 무너져 내려 한동안 흔적도 없었다. 폐허가 된 다경향실을 76년에 다시 세워 지금은 「다향실」이란 현판을 달았다. 지금은 운경(93)노스님이 거처하고 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나라에 변란이 있을 때마다 불탔던 봉선사에는 옛부터 「다로경권」이라는 현판이 전해져 내려 왔다. 이를 노리는 도둑 때문에 번듯하게 내걸지를 못하고 주지실 방안 벽장속에 깊이 보관해 두고 있다.<김대성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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