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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5】부산 영가대 다정/다향 2000년 인연의 흔적(차따라:5)

【0005】부산 영가대 다정/다향 2000년 인연의 흔적(차따라:5)

한국일보 97.06.03 24면 (문화) 기획․연재


◎ 한․일 사신 차례 올리던 곳… 지금은 기념비만 남아

/다도 동백섬․동래의 차밭골 등 곳곳 차 유래 지명


『해운대 동백섬 옛날 이름이 차섬(다도)이었다고?』

부산사람들조차 어리둥절해 하겠지만 예전 부산은 국내 최대의 차생산지인 전남 보성 못지 않은 차의 고향이었다.

첫번째 증거.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조용필의 노래로 유명해진 동백섬을 「차섬」으로 표기하고 있다. 두번째 증거. 온천으로 이름높은 동래의 동래원예고교자리는 예전에 「차밭골」로 불렸다. 얼마나 큰 차밭이 있었길래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 짐작만 할 뿐이다. 세번째 증거. 부산 북구 주례동 경남전문대 자리가 「냉정」으로 불리는 것도 이곳에 유명한 찻물샘이었던 「냉차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남여고 자리와 용두산에 있던 가마터와 다정은 네번째와 다섯번째 증거다.

부산의 차애호가들은 또 부산과 붙어있는 김해가 옛 금관가락의 고도이며, 가락국 시조인 김수로왕의 왕후가 시집올 때 차씨를 가져왔다는 이야기로 미뤄 부산은 이미 2000년전부터 차와 불가분의 인연을 가진 곳이라고 흥분해 말한다.

그래서인가. 부산에는 지금은 잊혀졌지만 임진왜란후 세워진 「영가대」라는 이름의 유명한 다정이 있었다.

지금의 부산 동구 범일동 자성대 서쪽, 초량쪽 바닷가에 있었던 영가대는 한․일 외교사절이나 무역상들이 입․출항할 때 반드시 들러 차례를 올렸던 곳이다. 또 귀인들이 차회를 열면서 풍류를 즐기기도 했으며 임금이 있는 서울쪽을 보고 예를 올렸던 망궐례나 뱃길의 안전을 비는 해신제나 용왕제를 지내는 제례당 역할도 했다.

영가대가 세워진 것은 임진왜란 얼마뒤인 1614년. 도쿠가와(덕천)막부가 들어선 일본과 국교가 회복되자 당시 경상도 관찰사 권반(1564~?)은 해안방위를 위해 부산포에 대형 전함이 정박할수 있는 선착장을 만들었다. 공사중 파올린 토사가 쌓여 긴 언덕이 되자 권반은 언덕끝 바다쪽에 정면 4간 측면 2간의 다정을 세웠다. 다정 이름은 자신의 본관인 안동의 옛지명 「영가」에서 빌려왔다.

1623년 도쿠가와 이에미쓰(덕천가광)가 일본대장군이 되자 이를 알리기 위한 일본통신사가 부산포에 왔다. 조정에서는 이민구(1589~1670)를 선위사로 임명, 관찰사 권반과 함께 이들을 맞게 했다. 이후 한․일간을 오가는 사신들은 반드시 이곳을 거쳐가게 됐다.

1719년 음력 6월6일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신유한(1691~?)이 「해유록」에 남긴 기록을 보면 영가대와 이곳에서 있었던 해신제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6일 정미. 영가대에서 해신에게 기도하니 전례에 따른 것이다. 대는 부산성 서쪽 큰 바다 위에 있었다. 높은 언덕이 10여길인데 웅장한 각이 공중에 솟아있어 배들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중략)부산진 절제사 최진추가 영가대 낙수받이 한복판에 단을 설치하고 단 아래 모난 다방 네 곳에 상과 돗자리를 설치하여 차병 씻는 자리, 찻잔 씻는 자리, 음복하는 자리, 위판쓰는 자리를 만들었다>

통신사 일행들은 이렇게 마련한 제단에서 여러가지 엄격한 금기를 지킬 것을 맹세한 후 해신제나 기풍제를 지냈다는 기록도 있다.

지금 영가대 자리를 더듬어라도 보려면 부산 동구 좌천동에서 경부선 열차가 꼬리를 물고 오가는 철길위 고가다리를 지나 범일동으로 넘어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범일동으로 넘어가는 고가다리 왼쪽 아래, 철길 바로옆 남쪽에 어른 키보다 작은 한평 남짓 슬레이트 지붕이 보인다. 허리를 구부리고 너덜너덜한 양철문을 열어보면 걸인들의 숙소인지 쓰레기같은 이부자리가 깔려있다. 이부자리옆에 1m 높이의 비가 하나 서있다. 「영가대기념비」라는 글자가 음각돼 있다.

부산이 차향임을 알려주던 영가대가 이처럼 온데 간데 없이 비석 하나로 남게 된 것은 1901년 경부선 철도공사로 영가대 북쪽 언덕 아래에 철길이 놓여지면서 부터였다. 1913년 이곳 바다가 육지로 매축되면서 바다에 발을 담그고 있던 그림같은 영가대는 육지속 동산이 되어버렸고 8․15해방 직전에는 아예 헐렸다. 세워진지 약 380년만이다. 지금의 기념비는 1951년 당시 한국청년구락부 북부산구단부 범2동 단부가 옛 다정을 아쉬워하면서 영가대가 있던 자리에 세운 것이다.

영가대 건물은 일본인 부산거류단 마지막 단장이었던 오오이케(대지충조)씨가 지금의 부산 동구청 부근에 있었던 자신의 별장으로 옮겼으나 언제 없어졌는지는 남아있는 기록이 없다.

영가대 자리를 찾아낸 김필곤(계간 다선편집장)씨는 『진취적 해양성 기질을 가진 부산의 차인이라면 부산항 명당자리에 새 영가대 다정을 만들어 세계적 명물로 가꾸어야 할것』이라고 말했다.<김대성편집위원>


◎ 알기쉬운 차 입문

/차맛의 절반은 물맛

옛 차인들은 차맛과 물맛을 가리는 데에 큰 비중을 두었다. 옛사람과 지금 사람들이 크게 다른 것 중 하나가 물에 대한 관념의 차이이다. 그 차이는 과거의 숨쉬는 물과 오늘의 진공포장 물의 차이이다. 차서에 의하면 「숨쉬는 오지항아리에 물을 담아 햇빛이 바로 들지 않는 서늘한 곳에 달과 별의 정기가 어릴 수 있게 보관하면서, 마치 맑은 물이 흐르는 시내와 같이 흰돌을 담구어 두면 물맛이 더 좋아진다」고 했다. 이를 물맛을 기른다고 하여 「양수」라 했다. 특히 항아리에 눈을 모아 두었다가 찻물로 쓰는 것을 운치있는 것으로 쳤다. 또 가을에 내리는 비나, 장마가 오기전 매화가 익을 때 오는 비(매우)를 받아다가 차를 끓이면 그 맛이 기이하다고 했다. 이 비나 눈은 하늘샘(천천)으로 불렀다. 자연의 숨결이 살아있는 물을 가장 좋은 물로 여긴 것이다.

그러나 하늘샘이 오염된 지금, 가장 운치있고 기이한 차맛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 다음 등급이 산의 물이고, 강물이 또 그 다음, 우물물은 가장 아래로 쳤다. 사람 사는 곳과 멀리 떨어질 수록 좋은 물이었지만, 이도 이제는 마음놓고 마실 수 없는 물이 되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오늘의 진공포장 물이다. 예전의 「살아있는 물」이란 개념이 「깨끗한 물」이란 개념으로 대치된 것이다. 약수에 차를 끓이면 찻물이 탁해지거나 심지어는 붉게 변할 때가 있다. 물의 좋고 나쁨을 구분할 때 차를 우려보면 금방 알 수 있다고 한다. 차와 물은 그만큼 서로 민감한 반응을 한다.

하늘샘은 하늘의 별따기고 생수값도 만만치 않다. 그럴때는 수도물을 하루 정도 항아리에 받아 두었다가 차를 끓이도록 한다. 이런 준비도 미처 되지 않았으면 물을 끓일때 물주전자 뚜껑을 열고 염소 냄새가 완전히 없어지도록 한다. 집집마다 거금을 주고 정수기를 들여놓는 지금, 깨끗한 물을 마시게됐다고는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되 환경을 지키고 가꾸는 일이야말로 차인들의 첫번째 일이다. 차를 마신다는 것은 맑은 자연으로 들어가는 첫 걸음이다.<박희준 향기를 찾는 사람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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